뉴욕 유니온 신학교 에서 American Liberal Theology 라는 제목의 수업을 듣고 있다. 교수님은 라인홀드 니버 교수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는 게리 도리엔 Gary Dorrien 박사 . 놀랄만큼 방대한 지식과 분석력을 가진 역사 신학자이자 윤리학자이다. 오랫동안 Theology 공부를 안 했더니, 요즘은 신학관련 글을 읽는 것이 힘들다. 거의 매주 페이퍼 하나씩을 써 가야 하는데, 왜 이리 어려운지...
페이퍼 중 하나를 한국어로 번역해 보았다. 영어가 아닌 한국말로 옮기면 어떻게 될까 궁금하기도 하고 해서... 써 놓고 나니, 뭐 내용이야 기말페이퍼도 아닌 독후감 수준의 response paper이니 깊이가 없다손 치더라도... 내 한국어 실력이 문제인지 번역이 어려운 건지...참 심란하다. 영어를 잘 하는 것도 아니고, 한국어 표현 능력은 자꾸 떨어지고..ㅠㅠ 특히 마지막 라우센부쉬의 문장은 번역하면 느낌이 사라질 것 같아 그냥 두었다. 라우센부쉬와 사회복음....아직 연구가 많이 더 필요한 부분이지만, 일단 다음으로 미루어놓고 (또!) 일단 여기서 넘어가자. (구글에서 다운받은 라우센부쉬의 책 두권을 첨부한다.)
월터 라우센부쉬, 세계화, 그리고 하나님 나라
"라우센부쉬 이후에, 어떤 복음도 사회복음이 아닌 것이 없다." 듀크의 저명한 기독교 윤리학자 스탠리 하우어워스의 말이다. 실제로, 월터 라우센부쉬 이래로 사회 복음 (Social Gospel)의 유산은 기독교 신학과 윤리 뿐 아니라, 주요한 기독교 사회 운동에 깊은 영향을 끼쳐왔다. 하지만, 기독교가 아직도 라우센부쉬가 직면했었던 것과 다르지 않은 사회문제들을 직면하고 있는 것은 슬픈 일이다. 차별받고 착취당하는 노동자들은 여전히 존재하며, 아직도 가난으로 인해 굶어 죽어가는 아이들이 이 땅에 넘쳐난다. 그리고 그가 아이들의 장례식에서 아픈 마음으로 "도대체 왜 아이들이 죽어야만 하는가?"하며 울부짖던 그의 애가는 오늘도 세계 곳곳에서 들려온다. 이것이 왜 우리가 사회복음의 유산을 이 21세기의 사회속에서 다시 살펴보아야 하는 이유이다.
사회복음이 아직도 오늘날의 사회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하나의 적실성있는 대안이 되어질 수 있을까? 100여 년전 미국 개신교의 문화적 가정 (supposition)에 의해 만들어지고 움직여지던 사회 복음 운동이, 과연 오늘날의 교회가 세계화와 관련된 많은 이슈들과 긴장들을 다루는데 있어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라우센부쉬의 사회복음 신학은 오늘날 미국의 국제정치에 있어서의 다양한 이슈들에 적절한 대답들을 하고 있는가?
이러한 질문들을 가지고, 먼저 "죄"에 대한 라우센부쉬의 신학적 견해부터 살펴보자. 그는 죄를 일종의 "사회적 힘 (social force)," 또는 "자기 (self)와 사회간의 갈등"으로 이해했다. 다른 많은 자유주의 신학자들과 달리, 그는 원죄에 대한 그의 신념을 버리지 않았다. 그는 "악의 초자연적 힘과 원죄의 사회적 실체"를 인식하고 있었다. 라우센부쉬에 따르면, 죄는 사회적 전통의 라인을 따라 전달되어지는 것 (transmiited)"이다. 다시 말해서, "어른들의 지속적인 악덕과 범죄는 유전적으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화(socialized) 되어짐을 통해 전달되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 죄는 본질적으로 "이기심 (selfishness)"이다. 이러한 정의는 사회복음을 다른 개인주의적 성향의 다른 종교와 구별시켜준다. "죄된 마음은 비사회적 혹은 반사회적인 마음이다." 따라서 죄의 실체와 본질은 국가의 재산을 일정 계층의 사유재산으로 만들거나, 노동자들들이 불이익을 당하게끔 내버려두는 사회 단체들 속에서 발견되어진다 .
라우센부쉬는 악한 사회구조가 좋은 사람들로 하여금 나쁜 것을 하게끔 만든다고 생각했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죄의 정점을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 속에서 발견한다. 고용주와 자본가에게 절대적 파워를 제공하는 자본주의 시스템 속에서, 노동자의 권리와 평등은 전혀 보호받지 못한다. 흥미롭게도, 라우센부쉬는 자본주의가 칼빈주의에서 비롯된 "종교적 검약 정신 (religious frugality)" 에 기초해 있다고 관찰한다. 막스 베버 (Max Weber)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The Protestant Ethic and the Spirit of Capitalism>를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나아가, 라우센부쉬는 자본주의가 그것의 토대를 갉아먹고 있다고 말한 다니엘 벨 (Daniel Bell)의 1976년 책 The cultural contradictions of capitalism 을 예상이라도 한 듯, 1915년에 쓴 그의 책 Christianizing the Social Order 에서, 자본주의의 상품화하는 정신이 사람들의 이기심을 조장하면서 칼빈주의의 후예들의 덕목을 위협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나는 자본주의에 대한 그의 통렬한 비판들 중에서, 자본주의가 "미국인들의 이기적 본능을 지나치게 개발시킨다" 고 한탄한 점에서 깊은 인상을 받는다. 라우센부쉬는, 미국인들이 오직 전쟁할 때만 공동의 목적이라는 기치를 내세운다고 비판했다. 만일 죄가 본질적으로 이기적인 것이라면, 그리고 이기심이 사회문제들을 발생시키는데 있어서 하나의 힘으로 기능하는 것이라면, 당시 미국인들의 자기 중심적 혹은 자국 중심적 사고방식은 그야말로 죄악의 원천인 것이었다.
사실, 사회복음 운동을 연구하면서 나를 혼란스럽게 만든 것은, 당시 대부분의 자유주의 신학자들과 사회복음 운동가들이 전쟁을 반대하던 그들의 입장을 윌슨의 전쟁 개입 결정 직후 급선회했다는 점이었다.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우드로우 윌슨 (Woodrow Wilson)이 세계 민주주의를 수호할 미국의 책임을 내세우며 미국인들의 도덕적 열정에 호소함에 따라, 대부분의 사회복음 리더들 - William Adams Brown, Henry Churchill King, Sailer Mathews, Lyman Abbott, ect- 이 윌슨의 정치적 이상주의를 "사회복음 이상주의 (social gospel idealism)"의 한 예로서 받아들이며 적극 찬성하였다.
라우센부쉬가 볼 때, 그와 같은 생각들은 너무나 미국 중심적이어서, 그들로 하여금 국내에서 발생하는 여러가지 문제들을 발생시키는 탐욕과 똑같은 종류의 탐욕이 전쟁을 불러 일어난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 하여, 라우센부쉬는 말한다, "사회 문제와 전쟁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하나의 문제이다. 사회복음은 이 두가지를 모두 직면하고 있다."
라우센부쉬는 국제적인 이슈들을 다룰 수 있는 보다 큰 의미에서의 사회 복음에 대한 비전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이점이 오늘날 소위 세계화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관심을 끄는 부분이다. 미국인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미국의 노동자들이 경험하는 불평등과 부정의가 한국의 노동자들이 자국에서 경험하는 그것들과 깊은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다. 자본주의 시장이 미국으로부터 전세계로 확장됨에 따라, 사회문제는 점점 더 복잡해졌다. 한 국가 안에서 발생하는 사회문제들을 그저 국내 문제로만 생각하고 해결하려고 해서는 안 되는 상황이다. 기독 교회는 이와 같은 현실에 대한 적실성 있는 신학적, 윤리적 대답을 만들 수 있을 것인가? 예를 들어, 오바마 대통령이 미국 내 노동자들의 권리를 보호한다는 명목하에 현 국제무역을 자국 중심적으로 이끌어 나갈 경우, 그것은 필연적으로 한국이나 다른 아시아 국가들의 노동자들의 권리와 상충되어질 것이다. 이럴 경우 사회복음의 유산을 이어받은 미국의 기독교 리더들은 어떤 제안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인가?
라우센부시와 많은 사회복음 운동가들은 기독교 사회주의가 자본주의의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하나의 강력한 방법이라고 믿었다. 그들이 볼 때, 당시의 자유방임 (laissez-faire) 경제의 이데올로기는 자본주의 시장구조서의 힘의 불균형을 무시함으로, 노동자들과 가난한 자들을 영속적으로 위협하고 있었다. 따라서, 경제적 파워를 민주화 (democratization) 하기 위한 비전을 가지고 있었던 사회복음 리더들은 정부가 경제를 규제함으로써 가난한 자들을 보호하는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라우센부쉬에게 있어서, "경제적 민주주의(economic democracy) 없는 정치적 민주주의 (political democracy)는 현금화되지 않는 약속어음 (uncashed promissory note)이고 내용 없는 형식"에 불과했다. 근대 미국의 노동자들은 정치 영역에서 하나의 권리를 가진 시민권자들이었지만, 경제적 영역에서는 전혀 그렇지 못했다. 이러한 구조에서는, 경제적 힘을 가진자들이 필연적으로 정치적 힘을 소유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경제적 민주주의가 담보되지 못한 정치적 민주주의는 실체가 없는 허울일 뿐인 것이다.
물론, 그가 말하는 경제적 민주주의는 재산권 자체를 없애자는 의미는 아니다. 정치적, 경제적 민주주의 하에서 재산권의 확장을 말하는 것이었고, 이 부분에서의 정부 개입을 요구한 것이었다. 그는 중앙집권적 집산주의 (centralized collectivism)을 반대했고, 민주주의 사회에서의 시장의 필요성을 인정했다. 이런 점에서는 그의 기독교 사회주의는 막시즘과 다르다. 하지만 문제는, 어떻게 시장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시장 안에서의 민주적 구조를 만들어내는가 하는 것이다. 막스의 비전과 자본주의 사이에서 라우센부시는 지나치게 이상적인 것은 아닌가? 이런 문제에 대해서, 그는 존 스투어트 밀 (John Stuart Mill) 의 분권화된 형태의 사회주의 비전에서 해답을 찾는 듯하다. 라우센부시는 그의 책 Christianizing the Social Order에서, 밀이 주장한 "노동자들이...집단적으로 자본을 소유하고 자신들이 선출하고 제거할 수 있는 경영자들 하에서 일하는" 비전을 수용한다. 시장을 인정하지만, 분권화된 혹은 다원화된 경제적 사회주의가 힘의 불균형으로 인한 사회 경제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라우센부시가 자본주의 시스템이 가진 힘의 불균형 문제를 그토록 비판한 것은, 힘을 민주화 하는 것 (democratization of power)이 "하나님 나라"의 본질이기 때문이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결코 힘을 독점하지 않는다. 하나님도 힘을 나누어주신다. 그는 언제나 하나님 개념을 민주화하려고 애썼다.
라우센부시와 당시 사회복음 운동가들의 비전은 실제로 미국 정치와 경제에 어느 정도 적용되었으며, 특히 뉴딜 정책을 통해 부분적으로나마 실현되었다. 흥미롭게도, 지난 해 말부터 시작된 경제 공황과 그로 인해 계속하여 제기되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 그리고 경제문제에 대한 국가의 개입이라는 이슈들이 라우센부시 시절의 상황과 흡사한 상황이 됨에 따라, 오늘날 다시 사회 복음 운동가들의 목소리가 재조명받을 수 있는 장이 열린 것으로 보인다.
누군가 독점하고 있는 힘을 민주화하고자 하는 사회 복음의 이상은 오늘날 국제 정치의 다이나믹 속에, 특히 국제 무역의 영역에서도 적용되어야 한다. 그것이 국제적 이슈들도 다룰 수 있는 사회복음을 주장했던 라우센부시의 비전이었다. 이런 점에서, 국가간의 힘의 불균형을 무시하면서 자유 무역을 주장하는 신자유주의는 이러한 사회 복음의 비전에 의해 도전되어져야 한다. 물론, 당시 사회 복음 운동의 하락에서 보듯이, 그러한 도전들이 하나의 완벽한 경제 구조나 완벽한 사회 질서를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라우센부시가 말했듯이, "At best there is always an approximation to a perfect social order. The Kingdom of God is always but coming. But every approximation to it is worth while."